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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희망을 쏜다-애틀랜타] 쉐퍼드병원 코디네이터 홍미나씨

"휠체어에 앉아서 바라보는 세상은 나에게 암흑과 같았다. 하지만 내가 만든 그 컴컴한 감옥에 갇혀서 바늘구멍만한 틈으로 들어오는 빛을 바라보고 있으니 어느 순간 그 빛이 나에게 너무나 밝은 세상으로 다가왔다." 한 때 남부러울 것 없는 여자가 있었다. 9살때 미국으로 이민 와 대학을 졸업하고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다. 두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던 어느 날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고 여자는 어둠 속에 갇힌 장애인이 되었다. 그러나 1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휠체어에 앉은 여자는 자신과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또 다른 희망을 말하는 사람으로 변신했다. 이 영화 같은 스토리의 주인공은 애틀랜타 미드타운의 쉐퍼드센터 병원에서 피어 서포트 그룹(Peer Support Group)의 코디네이터로 일하고 있는 홍미나(45)씨다. 자신처럼 척추 손상으로 병원에 실려 온 사람들이 바뀐 세상에 적응하고 숨겨진 잠재력을 발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그의 역할이다. 1999년 2월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 조지아로 향하는 고속도로에서 홍씨가 운전하던 차가 전복됐다. 완벽했던 행복이 산산조각 난 그날 밤 홍씨는 끝없는 절망에 빠졌다. "남편을 죽게 하고 아이들에게 아빠를 빼앗아 갔다는 죄책감 평생을 장애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정말 견딜 수 없이 괴로웠어요. 지금까지 살면서 나쁘게 살지 않았는데… 하느님께 수천 번 물어봤어요. 왜 나죠?" 하지만 그런 대답없는 물음보다 더욱 힘든 것은 '차라리 죽는 게 나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주변 사람들이었다. 남편을 잃고 두 다리를 움직일 수 없이 살아야 하는 세상은 홍씨가 그때까지 살던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바지를 입고 샤워를 하는 기본적인 일상 생활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아이들 학교 보내고 나면 하루 종일 앉아서 TV와 천장을 봤다. 그리고 2시가 되어서야 씻고 화장을 했다. 3시30분이면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사고가 나고 2년쯤 지난 어느 날 갑자기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에요. 목표를 세우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게 1만개였다면 장애로 못하는 건 2000개. 그래도 아직 8000개는 할 수 있잖아요." 그리고 난생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일단 아이들의 건강보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쉐퍼드센터에서 사무직을 보는 어시스턴트로 취직해 지금의 피어그룹 프로그램 코디네이터가 됐다. "사고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거에요. 정상적으로 살던 사람도 어느 한 순간 장애인이 될 수 있어요. 그렇다고 세상이 끝나나요? 아니에요. 몸을 움직일 수 없다고 희망이 없어지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어느 날 갑자기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사람들에게 사실 세상은 낯설다. 이제 그들에게 새로운 일상(new normal)을 찾아주는 것이 바로 홍씨의 역할이고 보람이다. 새로운 일상에 적응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할 수 있는 새로운 것을 찾고 '삶을 살아가는' 반석을 마련해 주는 일이다. 얼마 전부터 홍씨는 장애아동을 위한 비영리단체와 조지아 주정부 기관 관계자들과 함께 모여 조직한 '한인 장애인 서포트그룹'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룹 활동을 통해 장애가 부끄러워 자신만의 감옥을 만들고 숨어있는 사람들과 소통하고 그들에게도 기회라는 것을 주고 싶어요. 장애가 있다고 해서 삶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불공평합니까.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문화 때문인지 자꾸만 장애를 숨기려고만 해요. " 그럴 때마다 홍씨는 자신의 가슴아픈 과거를 들춰 내 용기를 주려고 애쓴다. "사고는 나에게 아픔이었지만 저를 성장하게 한 기회이자 남을 생각하고 인내심을 기르게 해 준 밑거름이 됐어요"라고 말이다. 그는 은퇴 후 지금의 남편과 함께 장애로 꿈을 포기하려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찾아 주는 것이 꿈이다. 재활 치료위해 시작한 공예 솜씨, 수공예 주얼리 업체 대표로 변신 홍미나씨는 현재 수공예 쥬얼리 업체인 디자인스 바이 미나C(Designs by Minna LLC)의 공동대표이자 쥬얼리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홍씨의 작품은 전국적으로 550개 이상의 유명 부티크에 납품되고 있다. 낮에는 쉐퍼드센터에서 피어 서포트그룹 코디네이터로, 집에서는 쥬얼리 디자이너로 변신해 지하실에 꾸며놓은 스튜디오에서 쥬얼리를 만든다. 두 다리를 움직일 수 없으니 두 손을 이용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다 시작한 비즈공예는 끔찍한 사고 덕분(?)에 발견한 새로운 재능이었다. “취미삼아 비즈공예를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친구의 권유로 애틀랜타 다운타운에 있는 인만파크에서 열리는 페스티벌에서 내가 만든 쥬얼리를 팔기 시작했어요.” 준비된 테이블에 스카프 몇장을 깔아놓고 만들어 놓은 쥬얼리를 펼쳐놓았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틀만에 쥬얼리를 모두 팔았고, 1000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렸다. 이후 디자이너 샵이 몰려있는 벅헤드의 부티크에 홍씨가 디자인한 쥬얼리를 납품했다. “어느날인가 친구에게 제가 만든 쥬얼리를 보여줬더니 이걸로 한번 사업을 해보자는 거에요.” 친구와 함께 애틀랜타 다운타운에 있는 아메리카스 마트에서 트레이드 쇼를 기획해 디자인스바이미나를 알렸다. “많은 돈을 벌기위해 쥬얼리 디자인을 하는 것은 아니에요. 내가 만든 쥬얼리가 사람들을 빛나게 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 일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소중한지 몰라요.” 글.사진=김동그라미 기자

2009-12-31

[2010 희망을 쏜다-샌프란시스코] '티페트 스튜디오' 김승장 모델링 수퍼바이저

요즘 영화의 성공여부는 '컴퓨터 그래픽(CG)'이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땅이 갈라지고 건물들이 무너져 내리고 집채만한 파도가 휩쓸고 지나가는 모습이 관객들에게 얼마나 실감나게 다가가느냐가 관건인 셈이다. 관객들의 눈높이도 점점 높아지다 보니 이제는 CG에 들어가는 예산이 영화 전체 제작비용의 40~50%를 차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처럼 비중이 커지고 있는 CG 분야의 정상을 향해 달리고 있는 한인이 있다. 주인공은 전세계 영상 효과부문의 선두 회사 '티페트(Tippett) 스튜디오'에서 모델링 파트의 총책임을 맡고 있는 김승장 수퍼바이저(36). 모델링은 영화 컨셉이 나오면 캐릭터를 제작하는 초반 작업으로 외모와 표정 등 눈에 보이는 겉모양을 컴퓨터 3D로 만드는 작업이다. 이때 캐릭터의 모양 컬러 성질 등 외적인 모든 부분이 결정된다. 김씨는 지난 2000년 도미 샌프란시스코 아카데미 오브 아트유니버시티(AAU) 대학원을 졸업했다. 학부 학생때부터 이미 컴퓨터 그래픽 실력으로 이름을 날렸던 김씨는 학생이나 교수들 사이에서 그를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정도로 유명세를 탔다. 또 재학 당시 만들었던 작품을 전 세계 CG사이트 중 가장 큰 CG월드 소사이어티에 올리면서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3D로 제작한 이 작품으로 그는 CG 회사들의 주목과 함께 러브 콜을 받게 됐다. 당시 만들었던 작품이 AAU 공식 홈페이지에 아직도 올려져 있을 정도다. 피에타를 CG로 재해석한 이 작품으로 2004년 중견 CG회사인 오퍼니지에 입사했다. 그리고 2006년 현재의 티페트 스튜디오로 자리를 옮기게 됐었고 1년만에 모델링 수퍼바이저가 됐다. 이 회사에서 수퍼바이저가 되려면 평균 7년의 시간이 소요되지만 실력은 물론이고 김씨 특유의 근면.성실성 거기에 사람을 끌어들이는 부드러운 카리스마까지 보태진 결과였다. "너무 똑똑하고 센스가 있다면 이 분야 일은 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봅니다. 자기 자신에게 당할 수가 있거든요. 한 작품에 들어가면 최소 8개월에서 1년이 걸리기 때문에 조금은 우둔하고 뚝심도 있고 참을성이 필요합니다. 이런 것들을 견디는 사람이 최고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김씨는 '캐라비안의 해적 2''해리포터 4''아이언맨''골든 컴퍼스' 등 제목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유명 영화들의 모델링을 담당했다. 특히 지난 11월말 개봉해 흥행 대박을 기록한 '트와일라잇-뉴문(이하 뉴문)'에 등장하는 늑대 캐릭터도 김씨의 작품이다. 김씨는 이 늑대 캐릭터 연구를 위해 모하비 사막에 있는 늑대 보호소에서 한동안을 지내는 등 지난 1년간 늑대에 빠져 살았다. 그 결과 300개 이상의 늑대 표정을 만들어 냈고 입 모양 눈빛 걸음걸이와 방향에 따라 움직이는 털과 근육의 떨림까지 고스란히 스크린에 담아냈다. "피를 말리는 작업이지만 그만큼 캐릭터에 모든 애정과 열정을 담습니다. 이렇게 한 캐릭터를 탄생시키고 걷게 만드는 등 생명을 불어넣다 보면 살아있다는 착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자식을 키우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이처럼 애정을 담은 완벽주의를 고집하면서 CG그래픽 분야에 명성을 쌓아가고 있는 김씨지만 처음부터 CG를 선택한 건 아니었다. 강원도 산골에 틀어박혀 10년 동안 조각가로 살았다. 그가 진로를 수정한 것은 정적인 조각과 동적인 CG를 접목해 보자는 의도에서였다. 이같은 특이한 출발과 노력이 합쳐져 그는 계속 진화하고 있다. 김씨는 지금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첫 프로젝트로 2010년 회사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CG 분야에 있는 한인들이 모여서 마음껏 기량을 펼치고 일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한인은 다른 민족에 비해 특유의 섬세함을 지녔고 작업 속도도 빠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CG분야에 미국내 아시안중 한인들이 가장 많이 일하고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미국과 한국식 시스템을 접목한 회사를 설립한다면 미국 시장에서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이 분야에 최고가 돼 한국 CG발전에도 기여하고 싶습니다." 요즘 그는 시간을 쪼개서 회사 설립에 쓸 데모를 만들고 있다.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을 가진 김승장씨에게 2010년은 도전과 희망의 한 해가 될 것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김씨는 오클랜드 피스토스 장로교회에서 같은 회사에서 근무하는 10년 경력의 CG 베테랑 정유진씨와 만나 2006년 결혼에 골인했다. ■티베트 스튜디오는? 영상 효과의 전설 필 티페트가 설립 80년대 '로보캅' 시리즈로 명성 시작 '주라기 공원'으로 아카데미상 수상 샌프란시스코 인근 버클리시에 위치한 ‘티페트 스튜디오’는 영화속 영상효과(Visual Effect) 제작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로 이 분야의 전설로 불리는 필 티페트와 부인인 줄리스 로먼이 지난 1984년 설립했다. 티페트는 1978년부터 스타워즈 시리즈로 유명한 영화 감독 조지 루카스가 설립한 ILM(Industrial Light & Magic)에서 스톱모션 모델들을 제작, 지휘하면서 명성을 쌓았다. 80년대 ‘로보캅’시리즈의 로봇 캐릭터 및 미니어처로 이 분야 최고의 특수효과를 선보였다. 이후 미니어처 모델과 스톱모션을 대체하는 수단으로 컴퓨터 그래픽(CG)을 시작하게 됐고 현재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갖추게 됐다. 이를 바탕으로 ‘쥬라기 공원(1993)’으로 영상 효과 부문에서 아카데미상을 거머쥐었다. 이외에도 거의 매년 티페트 스튜디오는 아카데미, 에이미 등 유명 영화제에 단골 수상 후보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고스트 바스터즈 2’‘쥬라기 공원’‘스타쉽 트루퍼스’‘아마게돈’‘블레이드’‘맨인블랙 2’‘매트릭스-리볼루션스’‘헬보이’‘콘스탄틴’등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다. 한국 영화 ‘괴물’의 캐릭터도 티페트 스튜디오의 작품이다. 연간 매출액은 1000만달러로 사원 수는 200여명에 달하며 ‘창의성 아니면 죽음(Creative or Death)’이 회사의 모토다. 글.사진=김판겸 기자 pankkim@koreadaily.com

2009-12-31

[2010 희망을 쏜다-시카고] 시카고 칠드런스 콰이어 지휘자 조세핀 리

흑인, 히스패닉, 백인, 그리고 아시안 등 다인종 어린이들로 구성된 시카고 칠드런스 콰이어(Chicago Children’s Choir)는 미국을 넘어서 세계에 널리 알려진 시카고를 대표하는 어린이 합창단 중에 하나다. 이 합창단을 이끌고 있는 지휘자(예술감독)는 한인 2세 조세핀 리. 그녀의 손끝에 따라 단원들이 합창소리는 알레그로가 됐다가 아다지오가 되기도 한다. 초롱초롱한 눈매의 어린이 단원들은 매주 시카고 다운타운의 컬추럴스 센터 5층 연습실에서 지휘자 조세핀 리와 함께 자신들의 꿈을 노래로 펼치고 있다. 지난 1998년 10월, 대학원을 마친 후 시카고 칠드런스 콰이어 지휘자가 된 그는 이듬해 총지휘자가 됐다. 1956년에 창단된 시카고 칠드런스 콰이어의 역사상 가장 젊은 지휘자다. 조세핀 리는 “시카고 칠드런스 콰이어를 이끈 지 어느 새 10년이 됐다”며 “아이들이 내게 많은 감동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을 둘러싼 환경은 어렵지만 ‘인간으로 무엇을 하고 살 수 있을까’라는 근본적이 문제를 노래로 함께 풀어간다”며 “이들의 노래에는 진솔한 삶이 담겨져 있다”고 덧붙였다. 또 “단원 중에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해 사회에 취직한 아이들도 있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대학에 입학하는 아이들을 보면 가슴 깊이 감동을 느낀다”며 “단원들은 대부분은 저소득층으로 구성됐다. 이혼한 편부모 밑에서 자라는 아이들 그리고 경제적으로 몹시 어려운 아이들 등 흑인, 백인, 히스패닉, 아시안 등 인종을 초월한 모든 아이들이 시카고 칠드런스의 단원”이라고 소개했다. 크리스토퍼 무어(Christopher Moore)는 1956년 시카고 다운타운 남부 하이드 파크에 시카고의 다인종문화를 나타내는 시카고합창단을 창단했다. 문화가 틀린 청소년들이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가다 보면 서로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취지에서다. 시카고 칠드런스 콰이어 단원들은 조세핀 리 지휘자를 비롯해 전문가들로부터 기본 음악 이론과 전문 음악 등 합창 공연에 관한 교육을 받고 있다. 대중 공연을 통하여 이들은 자부심을 얻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합창을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워간다. 삶을 배우는 것이다. 1975년 시카고에서 태어난 조세핀 리는 드폴대학과 노스웨스턴 대학원에서 피아노와 지휘를 전공했다. 역사상 가장 젊은 지휘자 조세핀 리의 지도 아래 합창단은 많은 국내외의 연주를 훌륭하게 해냈고 조세핀 리는 2006년 시카고 트리뷴지가 선정하는 ‘올해의 시카고 예술인’에 선정됐다. 이에 앞서 2002년 코러스 아메리카(Chorus America)는 합창음악계의 위대한 지휘자에 경의를 표하는 로버트 쇼 지휘 첫 번째 명예회원으로 조세핀 리를 지목했다. 2007년에는 시카고의 유니언 리그 클럽에 의해 특별한 음악인(Distinguished Musician)으로 선정됐다. 또 Today‘s Chicago Woman Foundation에서 시카고의 ‘떠오르는 별’로 변화를 이끄는 40세 미만의 40명의 여성 중 한 명으로 뽑혔다. 시카고 칠드런스 콰이어는 매년 세계 각국으로부터 초청을 받는다. 조세핀 리는 세계 공연 중 특히 작년 6월 창단 이후 처음 가진 한국방문 공연을 손꼽는다.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오른 시카고 칠드런스 콰이어는 한국어로 ‘아리랑’과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불러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7월 6일까지 방문기간 동안 시카고 칠드런스 콰이어는 지방 공연을 비롯해 서울시소년소녀합창단과 함께 판문점을 방문해 통일을 염원하는 공연을 갖기도했다. 하지만 한국 공연 후 북한 방문을 계획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그는 “아버지가 북한 출신이었다. 한국방문에 앞서 유엔주재 북한 관계자에게 북한 방문을 타진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며 “기회가 되면 북한에서 통일을 염원하는 공연을 갖고 싶다”고 말했다. 조세핀 리는 “긍정적인 생각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라며 “좋은 음악가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프로로 만들어야 한다. 프로가 되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삶을 게을리 살아서는 안된다”고 당부했다. 또 “자신의 전공이 클래식이라고 클래식만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되며 다양한 음악에 접근해야 한다. 자신에게 프라우드한 것은 좋지만 이를 넘어 교만해서는 안 된다”며 “마이너리티로서 여러 어려움을 겪을 수 있지만 포기하지 말고 최선을 다할 때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시카고 칠드런스 콰이어 단원들에게 늘 주지하는 말이지만 한인 2세들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라고 전했다. 그는 “한인 자녀들은 부모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는다”며 “하지만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개척할 수 있는 마음가짐과 행동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조세핀 리 지휘자는 시카고 원로목사로 지난 2001년 작고한 고 리인목 목사와 고 리영순 여사의 무남독녀다. 현재 남편 케빈 맥컨기와의 사이에 2살 된 아들을 두고 있다. 2010년 달리는 시카고 한인2세들 2010년은 시카고 한인 2세들에게 남다른 해가 될 전망이다. 스포츠와 영화 그리고 정치분야에 진출한 한인 2세들이 각 분야 전문가들과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한인사회를 넘어 현지사회의 차세대 리더로 주목받고 있다. 골프는 인종을 떠나 제일 관심이 많은 스포츠다. 골프를 이끌 차세대 선수로 시카고 출신 고교생이 주목받고 있다. 지난 달 3~4일 플로리다에 있는 424개 골프 고교들이 참가한 ‘플로리다 고교 골프 챔피언십’ 대회에서 시카고 출신의 골프 꿈나무 김한별(17)군은 합계 9언더파로 개인전과 단체전 우승 등 2관왕을 차지했다. ‘플로리다 고교 골프 챔피언십’ 대회는 지난 1920년부터 시작한 대회로 미래 골프선수를 꿈꾸는 고교생들에게는 가장 권위 있는 대회다. 김 군은 올랜도의 대표적 지역 신문인 올랜도 센티널 지로부터 주목할 만한 최우수 고교 선수로 지목했다. 새로운 축구 강국을 꿈꾸는 미국에서 한인 형제를 주목하고 있다. 시카고 서버브 하일랜드 팍에 거주하는 앤드류·마이클 장 군은 각각 17세·15세 이하 미국 축구 국가대표 선수다. 팀에서 오른쪽 수비수를 맡고 있는 앤드류는 지난 8월 대표팀에 선발됐다. 앤드류는 다른 국가대표 선수들과 함께 플로리다 주 탬파시 인근의 브래든턴 대입준비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다. 하일랜드팍의 엠플레이스 주니어 고교에 재학 중인 동생 마이클은 미드필더다. 이 두형제의 꿈은 월드컵에서 형제가 함께 뛰는 것이다. 정치분야에 있어서도 한인 2세의 약진이 두르러진다. 스티브 김 공화당일리노이자문위원이 내년 치러지는 중간선거에서 일리노이 검찰총장직에 출마한다. 김 후보는 공화당 뿐만 아니라 민주당을 포함해서 주 전체를 선거구로 하는 공직에 나선 첫번째 아시안이다. 지난 10일 공화당 상원 대표 크리스틴 라도뇨와 하원 대표 톰 크로스은 공동으로 시카고 다운타운의 힐튼호텔에서 열린 스티브 김 후원의 밤을 마련했다. 이날 행사에는 주 상원이면서 주 재무관에 출마한 댄 루터포드 후보가 참가해 지지를 보냈다. 이밖에 시카고 출신 한인 2세 영화 제작자 제임스 최가 제작한 저예산 독립영화 ‘메이드 인 차이나(Made In China)’가 고향인 시카고국제영화제 뿐 아니라 SXSW영화제에서 최우수 영화를 수상했다. 또 독일 오든버그 국제영화제에서 관객상을 수상하는 등 전세계 10여개 영화제에서 좋은 성과를 얻고 있다. 시카고=임명환 기자

2009-12-31

[2010 희망을 쏜다-워싱턴] 워싱턴 DC 아태 주민국 구수현 국장

DC 시장실 산하 아시아 태평양계 주민국의 구수현 국장(41·사진). 한국에서 태어나 대학원까지 마치고 미국에 이민 온지는 이제 11년째.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조차 쉽게 올라갈 수 없는 자리에 당당히 오른 그도 처음엔 언어 장벽의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사실 지금도 여전히 언어 장벽에 부딪히고 있다”며 “당당하게 말하고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 즉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에 특히 주의를 기울인다”고 말했다. 처음 미국에서 가진 직장은 소규모의 중국인 회사였다.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한국어와 중국어 통ㆍ번역을 공부해 중국어엔 자신이 있었던 덕분이다. 한국에 있을 땐 중국어 동시 통역사 또 방송국에서 중국 관련 다큐멘터리의 전문 번역가로 일했다. 주로 정치 경제와 관련된 분야의 동시 통역을 하다보니 국제 관계 및 국제 정치에 늘 관심이 있었다. 약 6개월간 근무를 하며 미국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고 이후엔 2년간 커뮤니케이션과 관련된 미국 회사로 직장을 옮겨 인사 업무를 맡았다. 워싱턴 시정부에 첫발을 딛은 것은 우연히 직원 모집 광고를 보고 지원하면서다. "당시 40대 1이라는 경쟁을 뚫고 입사해서 사무국의 말단 홍보관으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예전엔 아ㆍ태계 주민이나 상인들의 어려움을 직접 알아보기 위해 밖으로 나가 발로 뛰면서 사람들을 많이 만났죠. 한인들이 운영하는 가게는 노스웨스트이건 사우스이스트건 가리지 않고 다 다녀봤어요. 물론 지금도 나가긴 하지만 이젠 하는 일이 많아져서 예전만큼 자주 나가서 찾아뵙지는 못하네요." 지금은 중단됐지만 워싱턴 시내의 아ㆍ태계 상인들을 위해 한국어 중국어 베트남어로 교육 세미나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맡으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상인들의 경우 시간을 내기 힘들고 가게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하기 힘들다는 점을 감안 워싱턴 시의 8개 관구를 돌며 세미나를 진행하는 아이디어를 냈다. 시 전 지역에서 실시된 이 프로그램은 상인들에게 시 정부가 하는 일 등을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했다. 이 밖에 구 국장은 워싱턴 시 정부 최초로 아태계 이중언어 구사자들을 위한 취업박람회를 개최하고 시정부 각 부서 국장들과 아ㆍ태계 지역 대표들과의 상시 면담 등을 통해 아태계 주민 및 상인들의 권익을 대변하고 옹호하는 직통 창구를 개설하기도 하는 등 눈부신 성과를 거듭했다. 그가 총괄하는 주민국은 직원 7명에 자문 위원 15명의 다소 작은 규모. 하지만 하는 일은 어느 부서에 못지 않게 아니 오히려 더 방대하다. 무엇보다 아ㆍ태계 주민이나 상인들이 시정부의 프로그램이나 서비스를 원활하게 받을 수 있도록 조력자 역할을 하는 것이 가장 큰 부분이다. 또 아ㆍ태계 주민들의 교육과 경제 안전 고용 주택 환경 문제 등을 다각도에서 살피고 도움을 제공하는 일도 맡고 있다. 이를 위해 한달에 적어도 한 번은 다양한 분야의 세미나를 개최하고 있다. 또 DC 차이나타운의 보존 및 개발 계획 아태문화 유산의 달 행사 고충 전담 상담 창구도 상설 운영중이다. 그는 "주민국은 시정부의 한 부서로 프로그램이 아닌 '사람' 중심의 부서"라며 "시간을 들여 여러 아ㆍ태계 지역 지도자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신임을 얻고자 노력했고 또 한국계 미국인이지만 중국어를 구사하고 중국 문화를 이해한다는 장점덕에 중국 동포 사회에서도 신임을 얻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사람과의 만남을 중시하고 각 민족의 고유한 문화와 습성을 이해하려 노력하다보니 아ㆍ태계 커뮤니티로부터 전반적인 지지를 얻게 된 것이다. 그는 덕분에 사무국이 하는 사업 진행에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고 덧붙였다.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큰 장점은 삶에 대한 무한한 의욕과 긍정적인 사고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매일 아침 반신욕을 하며 하루의 계획을 시간대별로 일일이 수첩에 적어보는 계획성 있는 생활도 구 국장을 지금의 자리에 앉게 한 비결이다. 2010년엔 특별히 아태계 주민들의 센서스 참여를 독려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아ㆍ태계 주민들의 경우 전반적으로 센서스 참여도가 낮아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이에 따라 사실상 누릴 수 있는 많은 혜택을 못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태어나서 꼭 하고 싶었던 10가지'를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새해 목표다. "미국에 오자마자 일주일만에 일을 시작해 단 한번도 쉰 적이 없어요. 이젠 좀 쉬었다 다시 시작할 때가 된 것 같기도 하지만 글쎄요. 앞으로도 사무국의 서비스가 아태계 주민과 상인들에게 신속 성실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유승림 기자

2009-12-31

[2010 희망을 쏜다-워싱턴] 버지니아 주하원의원 마크 김

지난 11월 3일 치러진 버지니아 지역 총선에 미주 전체 동포사회의 눈과 귀가 쏠렸다. 바로 한인으로서 주하원의원에 첫 도전하는 마크 김 후보의 당락 여부가 관심거리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민주당 당적을 가진 마크 김 후보는 거듭된 오바마 대통령의 지지도 하락, 주지사 후보 크리이 디즈의 열세 등 악재와 맞물려 고군분투할 수밖에 없었다. 마크 김 당선자의 이번 선거전은 ‘한인도 주류 정치사회에 다가설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한 것은 물론 정치에 꿈을 둔 후세들에게도 자신감을 갖게 하는 이정표가 되고 있다. 마크 김 당선자에게 앞으로의 정치 포부를 들어 본다. -당선을 축하한다. 향후 최우선 과제는. "무엇보다 민생 현안문제다. 내가 속한 버지니아 지역 35지구는 비엔나(Vienna)라는 타운이 포함돼 있다. 최근에도 이곳 시장과 시의원 등과 면담을 갖고 여러 가지 현안에 대해 논의했다. 일단 연초부터 6~7개 민생 관련 법안을 입법 추진하려 한다. " -민생 현안이면 구체적으로 어떤 분야인가. "우선 교육 문제가 대두된다. 버지니아 지역은 미국에서도 전국적으로 알아주는 교육열이 뜨거운 곳이다. 이는 체계적인 공교육 시스템이 근간이다. 그런데 장기 불황이 지속되면서 주정부의 예산 지원이 많이 줄게 됐다. 2010~2011년 회기 예산 발표를 보면 페어팩스 카운티의 예산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대략 50~60만 달러가 감소한다. 나와 뜻있는 정치인들은 교육 특별 법안을 내놓아 이같은 위기를 막아 볼 생각이다." -당선후 한인사회 반응은. "주하원의원 당선에 한인사회 모두 자기 일처럼 기뻐한다. 참으로 고맙다. 그런데 어떤 정책에 관해서는 아직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나는 한인 사회 개인이나 기관 단체 등을 만나면 항상 '도와드릴 수 있는 데로 다 도와드리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아직 한인 사회에는 구체적인 정치적인 이슈 등이 정립돼 있지는 않다. 내가 한인만을 위한 주하원은 아니지만 한인사회가 필요시 이용하고 도움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본다." -지난 선거에서의 승리 요인은 무엇이라 보나. "한인사회의 힘이 컸다. 나 역시 1.5세 이민자로 한번도 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잊은 적이 없다. 실제로 선거운동 과정에서도 나는 한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열심히 임했다. 가가호호 집을 방문하며 '나는 한인이다'라고 당당히 말했다. '나는 비록 소수 이민자 출신이지만 이 지역 발전을 위해 모두가 잘 사는 마을을 위해 열심히 뛸 각오가 돼 있다'고 호소했다. 정성이 갸륵했는지 유력 일간지 워싱턴 포스트가 나를 공식 지지해줬고 유력 정치인들의 지지 선언이 잇달았다." -도전을 망설인 적이 있나. "버지니아 페어팩스 지역은 내가 자란 토대는 아니다. 하지만 이 지역에는 이미 오랫동안 활동해 온 한인 선배들이 많다. 처음 내가 출마 결심을 했을 때 가장 고민이 됐던 부분이다. 그런데 선배들은 오히려 '누가 더 오래 살았냐가 뭐가 중요하냐. 순서를 따질 필요도 없다. 정말 좋은 한인이 주류 사회에 도전하는게 중요한 것 아니냐'고 말해줬다. 거기서 자신감을 받아서 여기까지 왔다. 힘이 돼 준 선배들께 감사한다." -의정 활동시 유념할 부분은. "상대당의 표적을 두려워해 눈치 보기식 정치를 할 마음은 없다. 소신 정치를 할 것이다. 주하원에는 상당수의 민생 현안들이 법안으로 제출된다. 처리 건수도 1개월에 무려 3000건에 달할 정도다. 이중 당론이 서로 대립되는 법안은 몇 되지 않는다. 대부분은 지역 현안들이 도마위에 오른다. 여기에는 '내당 네당'이 없다. 누구든 뜻이 맞는다면 당적을 떠나 좋은 정치 파트너로 일하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꿈을 이룬 한인으로서 희망의 말 한마디. "2009년 한해는 한인 정치 신예들의 활동이 많았다. 특히 1.5~2세들이 전국적으로 10명이나 출마해 힘찬 도전을 보여줬다. 그런데 결과는 나 혼자만 됐다. 사실 성공 확률이 중요한게 아니라 도전(출마) 확률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많이 나오면 나올수록 성공 가능성이 높다. 절대로 주저하지 말라. 정치에 꿈을 가진 젊은이들에게 꼭 도전하라고 말하고 싶다. 다가오는 2010년 이후로는 미국 전국 구석구석 마다 좋은 자격을 갖춘 한인 정치인들이 나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마크 김은 누구? 버라이즌 부사장 출신…오바마 대선 승리 견인 마크 김(Mark Keam)은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김 당선자의 아버지는 장로교단 소속 한국 육군내 군종목사로 근무하다가 월남 파병과 온 가족이 호주 이민 등을 거쳐 1980년 미국 이민까지 오게 됐다. 김 당선자는 UC 어바인(UC Irvine)에 입학, 정치학을 전공하면서 교내 및 교외 정치활동에 관여했다. 이어 로스쿨을 나와 변호사로 활동하다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의 고문 변호사로 채용됐다. 이때 클린턴 정권 당시 딕 더빈(Dick Durbin) 연방 상원의원의 보좌관으로 스카웃되면서 미 연방의회에 처음 발을 내디뎠다. 2007년에는 이동통신회사인 버라이즌의 부사장직으로 자리를 옮긴 후 오바마 대통령이 버지니아 지역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하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김 당선자는 부인 알렉스 성 김 씨와의 사이에 7살난 아들 타일러 제퍼슨 김과 5살난 딸 브렌다 니콜 등 두 자녀를 두고 있다. 천일교 기자

2009-12-31

[2010 희망을 쏜다-뉴욕] 인쇄회사 유니콘 그래픽스 이종석 사장·이종훈 부사장

현재 자타가 공인하는 한인 최대 인쇄회사로 탄탄하게 입지를 굳힌 유니콘 그래픽스는 과감한 설비 투자를 통해 이 꿈을 이루기 위해 그동안 차근차근 준비해왔다. 2007년 3만스퀘어피트 규모의 현재 사옥으로 옮기면서 고급 인쇄를 할 수 있는 300만달러짜리 옵셋 인쇄기를 들여놨다. 올 들어서는 더 다양한 고객 만족 정책을 시행하고 시간 절약과 인쇄 고속화, 더 나아가 품질 향상을 실현하기 위해 디지털 인쇄기와 실사출력기, 컴퓨터 제단기를 도입했다. 이종훈 부사장은 "실사출력기 도입으로 그동안 할 수 없었던 유리.알루미늄.플라스틱 등 다양한 재질에 양질의 인쇄를 할 수 있게 됐다"며 "이같은 새로운 시도를 알게 된 고객들도 상당히 고무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기존의 종이 인쇄기에 디지털 인쇄기까지 추가되면서 거둔 시너지 효과도 상당하다. 기존 고객에게는 품질이 향상된 인쇄물을 통해 고급 마케팅 툴을 제공할 수 있게 된 것은 물론 새로운 고객 창출 가능성도 활짝 열렸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지금까지 이뤄온 연 10% 매출 성장 기록을 계속 이어가며 새해에는 업계 선두주자가 되겠다는 각오다. 이 부사장은 "새해에는 실사출력기를 본격적으로 활용해 앞서가는 기술력을 바탕으로 미국 인쇄업계를 선도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달력회사로 출발= 유니콘 그래픽스는 처음에는 단순한 달력 판매 회사로 출발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력은 물론 고급 카탈로그 브로셔 등 사업 범위를 늘려가며 한인업계의 선두주자로 위상을 확립하고 주류업계에도 인지도를 확실히 다져가고 있다. 유니콘 그래픽스는 지난해 연매출은 500만달러. 로스앤젤레스 지사인 달력전문 인쇄회사 '유니콘 웨스트'와 종이.잉크 등을 수출하는 한국의 인쇄용 자재회사 '유니콘 코리아'를 포함하면 연매출이 850만달러에 달한다. 연매출은 매년 10% 이상씩 성장해 왔다. 1980년대 초 이민 와 노점상과 야채가게를 운영하던 형제가 우연한 기회에 지인의 권유로 달력 시장의 잠재력을 발견하고 뛰어든 것이 유니콘 그래픽스의 시초다. 1985년 한국의 달력제작 전문업체인 홍일문화와 한국달력 미주판매 계약을 체결하고 올린 첫해 달력 판매 실적은 불과 5000부. 하지만 지금은 매년 200만부에 달하는 달력을 생산하고 있다. 지금 전체 매출에서 달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10% 정도. 카탈로그.브로셔 등 고급 인쇄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달력을 주문하는 주요 고객은 타이슨 푸드.지멘스.오션스프레이 등 수천개 기업들 카달로그.브로셔 등 고급 인쇄 고객은 회계법인 딜로이트.컬럼비아 대학.코스트코 등 수백개에 달한다. ◇성장 동력은 아낌없는 설비투자= 1985년 달력 판매를 하다 이듬해 집 차고에서 달력 출판업체인 유니콘 그래픽스를 설립했다. 1988년 1000스퀘어피트 규모의 LIC 사무실로 이전한 후 1992년에는 칼리지포인트에 5000스퀘어피트 규모의 공장으로 이전했다. 2005년에는 판당 제작비 원가가 30% 이상 늘어남에도 불구하고 현상액과 같은 화학약품이 필요없는 친환경 인쇄판으로 전부 교체하기도 했다. 이처럼 이사가 잦았던 이유는 고객 만족을 위해 기계설비와 서비스 업그레이드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 계속되던 설비투자는 마침내 2007년 700만달러를 투자해 지은 현재의 사옥으로 마무리됐다. 이 부사장은 "연매출 500만달러 회사가 700만달러를 투자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었다며 "하지만 고객들의 요구가 다양해지고 있어 고객 만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투자였다"고 설명했다. ◇'올인' 정신으로 무장= 신기술 습득과 기술 개발을 통한 앞선 경영으로 일년 전부터 시작된 경기침체 속에서 오히려 매출 증가를 기록하고 있다. 경기회복 전망이 나오면서 주요 고객들이 지난해보다 마케팅을 더욱 활발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부사장은 "올 봄 20%의 매출 하락을 경험했으나 지난 9월부터는 매달 월별 최고치 신기록을 세우고 있다"고 말했다. 10년 전부터 발빠르게 시작한 주류 마켓 진출 노력도 주효했다. 현재 고객의 90%가 타민족 회사다. 1997년 IMF 외환위기 때 자금 유동성 문제로 아이 백일반지까지 팔아야 할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다는 이들 형제는 지금처럼 힘든 외부환경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기술 개발에 힘을 쏟고 전문성을 갖추려기 위해 일관된 노력을 기울여 왔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새로운 일에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면 '올인'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 형제의 경영철학이다. 앞으로의 목표는 유니콘 그래픽스를 인쇄업계 기술력의 일인자로 만드는 것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그동안 벌어들인 수익을 회사에 아낌없이 재투자하고 있다. 이 부사장은 "흔히들 말하는 사업계획이나 매출 목표가 얼마라는 식의 계획은 세워본 적이 없다"며 "지속적인 기술.설비투자로 고객 감동을 이끌어내고 이를 통해 단골고객을 확보하면서 사업을 성장시키는 것이 우리 방식"이라고 말했다. 글.사진=최희숙 기자 hs_ny@koreadaily.com

2009-12-31

[2010 희망을 쏜다-뉴욕] 109경찰서 대민담당 김기수 형사

뉴욕시 최대 한인 밀집지역인 퀸즈 플러싱을 관할하는 109경찰서 대민담당 김기수 형사(43·사진). 김 형사는 올해로 19년째 109경찰서에서 근무하고 있다. 한인들의 입과 귀 역할을 하고 있는 김 형사는 곧 20년 근무 연한을 채우고 현역에서 은퇴할 시점에 가까워지고 있다. 김 형사는 이제 40대 초반에 불과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곧장 경찰이 됐기 때문에 어느덧 20년 가까이 근무하게 된 것. 그러나 대민담당 경찰로서 김 형사의 열정은 이제 막 폴리스아카데미를 졸업한 신참 못지 않다. 본인 스스로도 ‘은퇴’를 묻는 질문에 “아직은 아니다”고 잘라 말한다. ◇내년 목표는 한국어 실력 늘리기= 김 형사는 2010년 자신의 일과 관련해 두가지 목표가 있다고 말했다. 첫째는 한국어 실력을 더 늘리는 것이고 둘째는 계몽활동을 통해 한인 관련 범죄율을 더욱 낮추겠다는 것이다. 폴리스아카데미를 졸업한 신입 경찰중 한국어를 구사하는 경찰이 플러싱 지역에 더 많이 배치될 수 있도록 건의도 할 계획이다. 김 형사는 "한국어가 많이 늘었지만 아직 완벽하지 못하다"면서 "내년에는 한국어 드라마 등을 보면서 언어 구사 능력을 키우는데 더욱 노력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전체적으로 109경찰서 관할 지역의 범죄율이 낮아져야 하겠지만 특히 한인들의 범죄율이 낮아지도록 동포들을 상대로 계몽활동에 주력하고 싶다"고도 말했다. 김 형사가 이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이유는 한인타운 유흥업소 등지에서 술을 마시다가 시비가 붙어 폭행 사건으로까지 비화되는 일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또 동포들끼리 서로 속이고 속이는 사기사건도 점점 늘고 있다. 그는 이와관련해 "미국에 살면서도 한국적인 사고방식으로 행동하다가 뒤늦게 후회하는 경우가 많다"고 쓴소리를 했다. 한때는 10명을 훌쩍 넘기던 109경찰서내 한인 경찰 숫자가 최근에는 8명으로 줄어든 것도 김 형사에게는 걱정이다. 최근에는 매년 폴리스아카데미를 통해 한인 경찰 10여명이 배출되고 있는데 이들은 뉴욕시내 각 경찰서로 뿔뿔이 흩어지기 일쑤. 김 형사는 "플러싱 지역이 한인 밀집지역인 만큼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경찰이 한명이라도 더 배치되어야 동포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 "이 때문에 서장에게 우리 경찰서에 더 많은 한인 경찰이 필요하다고 꾸준히 건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인경찰 후배들이 큰 힘= 사실 김 형사는 109경찰서와 인연이 남다르다. 지난 91년 뉴욕시립 퀸즈칼리지를 졸업하고 곧장 경찰시험에 응시했다. 같은해 폴리스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처음 배치된 곳이 109경찰서였다. 근무지가 한인 밀집지역에 위치해 있다보니 김 형사는 대민담당으로 발령받기 이전에도 동포들의 '입과 귀' 역할을 떠맡아야 했다. 김 형사는 지난 2001년 11월 대민담당 경관으로 처음 임명돼 올해로 8년째 주민들의 입과 귀 역할을 하고 있다. 그가 대민담당 경찰로 근무하기 시작하면서 동포들에게 경찰서의 '문턱'은 크게 낮아졌다. 어려움이 있어도 영어를 못해 선뜻 경찰서 가기가 두려웠던 플러싱 지역 동포들에게 이제 김 형사는 '가족'이나 다름없다. 김 형사는 또 지난 2004년 뉴욕한인경찰협회장으로 선출돼면서 커뮤니티에 한인 경찰들의 존재를 알리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 근무중 순직한 동료 한인 경찰의 자녀를 위해 협회는 기금모금 행사도 꾸준히 갖고 있다. 또 가까운 장래에 더 많은 한인 경찰이 배출될 수 있도록 장래 희망이 경찰인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장학 프로그램도 운영중이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한인 경찰은 50여명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200명을 훌쩍 넘어섰습니다. 그동안 커뮤니티를 대상으로 협회에서 지속적인 '경찰 지원 홍보 캠페인'을 벌인 결과이지요. 한인 경찰은 시경에서 소수계 중에서도 소수계로 꼽혀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양적으로도 팽창했고 능력면에서도 우수한 경찰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후배들이 하나둘씩 늘어날 때마다 가슴이 뿌듯합니다." 김 형사에게도 고민은 많다. 수많은 민원인들을 접하다 보면 돕고 싶어도 도와줄 수 없는 일도 많기 때문이다. 경찰서에 있다보면 '사기를 당했다' '돈을 떼였다'며 도움을 요청해 오는 동포들이 많다. 요즘은 경기가 어려워서 그런지 부쩍 그런 일이 잦아졌지만 경찰이 직접 도울 수 있는 일이어서 안타깝기만 하다. 김 형사는 한인들에게만 친숙한 것이 아니다. 중국계 등 기타 아시안 커뮤니티에도 얼굴이 잘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지역신문 퀸즈크로니클은 최근 김 형사를 '언어장벽을 뛰어넘는 이민자의 통로'라며 커뮤니티를 넘나드는 그의 활약상을 보도하기도 했다. 글.사진=안준용 기자 jyahn@koreadaily.com

2009-12-31

[2010 희망을 쏜다-뉴욕] abc 간판 아침 뉴스쇼 '굿모닝아메리카 앵커' 주주 장

장씨는 지난 12월 14일부터 abc ‘굿모닝아메리카’에서 뉴스 리더(news reader)라는 새로운 직책을 맡았다. 사실 그는 굿모닝아메리카 주말편, 뉴스매거진 20/20, 월드뉴스 리포트 등 다양한 프로그램에서 생방송을 해온 낯익은 얼굴이다. 하지만 abc의 간판 아침 뉴스쇼 굿모닝아메리카의 얼굴로 발탁되면서 하루아침에 신데렐라로 변신했다. 이제 미국인들은 주주장의 목소리를 들으며 새 아침을 맞고, 그의 눈을 통해 간밤의 세상을 읽는다. 새벽 4시30분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간밤의 뉴스를 챙기면서도 아내 노릇, 세 아들의 엄마 역할까지 눈코 뜰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수퍼 맘’ 주주장의 하루를 들여다 본다. ◇지역방송에서 공중파까지=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나 도미한 주주 장은 캘리포니아에서 자라고 스탠퍼드대학에서 정치학과 신문방송학을 공부했다. 샌프란시스코 지역방송인 KGO-TV에서 리포터로 방송일을 시작한 장씨는 1996년 abc방송국 계열사인 '뉴스 원'에 합류하면서 워싱턴DC에서 정치 분야 취재를 시작했다. 그후 1998년 abc에 합류해'20/20''월드 뉴스 투나잇' 등에서 앵커로 활약해왔다. 외국인 입양의 영향 전 세계적으로 퍼지고 있는 알비니즘(피부의 멜라닌 색소가 없어지는 현상) 환자들의 고통 성 전환을 결정한 아버지로 인한 가족의 충격과 적응 과정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리포팅해왔다. 굿모닝아메리카 뉴스 리더 직책을 맡은 이후 장씨의 하루는 새벽 4시30분에 시작된다. 스튜디오에 도착해 한 시간가량 헤어.메이크업을 받고 그날 읽을 뉴스와 인터뷰 내용을 준비하면 7시 정각 생방송에 들어간다. "한인임을 잊지 말라"고 항상 강조했던 아버지 장팔기씨의 영향으로 미주 한인 사회 뉴스에 대한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아버지 장씨는 요즘 딸로 인해 몰려드는 인터뷰 요청 쇄도로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고. 학부 시절 한인 박사 과정생들을 도와 미주 한인이 뉴스를 접하는 방법에 대한 연구를 도운 인연으로 한인들이 한국 사회 뉴스에 큰 관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는 장씨는 "아직도 아버지는 케이블채널 3개를 통해 한국의 뉴스를 모두 섭렵하는 동시에 지역 한인 신문을 통해 뉴스를 접한다"고 밝혔다. 동시에 미국 사회 뉴스 시청도 게을리하지 않는다고. 그는 "아버지가 한인이라는 자부심만큼이나 미국 사회에 대한 관심을 늦추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하셨다"고 밝혔다. 그가 중앙일보가 NBC방송국과 곧 시작하는 한글 자막 서비스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이는 이유다. 그는 "한인들과 미국 뉴스를 연결한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큰 서비스"라고 평가했다. ◇아들 셋의 엄마= 주주 장은 제러드 트래비스 메이슨 블레이크 세 아들의 엄마다. '주주 저글즈'라는 비디오 블로그를 통해 엄마와 아내 앵커로서 각기 다른 역할을 해나가는 자신의 스토리를 시청자들과 나누고 있기도 하다. 한 블로그에서 장씨는 아들에게 상을 차리고 바닥을 닦는 집안 일을 시키면서 부모들이 아들과 딸에게 집에서 시키는 심부름이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한 연구 조사 결과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이 블로그의 마지막 장면은 아들과 함께 수퍼마켓에서 장을 보는 것으로 끝난다. 바쁜 일과로 세 아들과 자주 함께 할 수 없다는 그는 "아이들이 일어날 때 함께 할 수 없는 것은 아쉽지만 아이들이 나 없이도 잘 커준다는 믿음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오후 2시면 일이 끝나는 장씨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시간에는 집에 있을 수 있는 것을 아침 방송의 장점으로 꼽았다. 동료 앵커 크리스 쿠오모는 "퇴근하면 곧장 집으로 가서 아이들이 오기 전까지 짧은 낮잠을 자두라"고 충고를 건넸다고. abc방송국은 '엄마' 주주 장의 사정을 고려해 집에서도 뉴스를 읽는 연습을 할 수 있도록 관련 기계를 설치해주기도 했다. 장씨의 남편은 공영방송 PBS의 회장인 닐 샤피로. 전 NBC 수석 프로듀서였던 그는 장씨의 '정신없는' 뉴스 앵커 일과를 누구보다 잘 이해해준다. 장씨는 "아이들 챙기는 것부터 바쁜 가삿일을 모두 맡겨도 항상 '물론이지'라고 답해주는 남편이 항상 고맙다"고 말했다. ◇한인사회 기부 문화의 디딤돌= 주주 장은 '하루에 1달러'라는 모토로 2003년 창립된 한인커뮤니티재단(KACF)의 자문위원이다. 당시 조원일 뉴욕 총영사를 중심으로 1.5세~2세 전문인들과 한인사회 기부 문화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고 그 결과 KACF가 탄생했다. 장씨는 아직도 KACF 첫 모임을 기억한다. 그는 "첫 모임으로 점심을 같이했던 때가 엊그제 같다"면서 "조 총영사의 비전을 시작으로 함께 한 젊은이들의 노력으로 현재의 KACF가 유지되고 있다"고 말했다. 좋은 뜻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 당시에는 KACF가 이렇게 성장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KACF는 현재 매년 10여개 한인 비영리단체를 선정해 기부금을 전달하고 있다. 지난 4년간 기부금이 100만달러를 넘어섰고 불경기 한파에도 기부금을 늘리고 있을 정도로 탄탄한 기부 문화 확산에 앞장서고 있다. 지난 9월 열린 연례만찬에서는 1000여명이 몰려 하룻밤에 90만달러를 모금했을 정도다. 이날 김용 다트머스대총장이 기조연설에 나섰고 그 자신도 하루에 1달러 기부 캠페인에 약정하고 돌아갔다. 장씨는 초기에는 이사로 KACF 일에 발벗고 뛰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일이 바빠져 일선에서 한발 물러나 자문위원으로 일하면서 매년 연례만찬 때마다 사회자로 봉사하고 있다. 조진화 기자 jinhwa@koreadaily.com

2009-12-31

[2010 희망을 쏜다-LA] "연아야, 올해에도 황홀경에 빠지게 해줘"

'피겨 요정' 김연아(19). 2010년 밴쿠버 올림픽에서도 가장 주목받을 꽃망울이다. 피겨 관계자들은 이변이 없는 한 밴쿠버에서 그녀가 금메달을 목에 걸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2009~2010 국제빙상경기연맹(ISU) 피겨 시니어 그랑프리에서 김연아는 역대 최고점인 210.03점을 올린 이후 여자 피겨 싱글에서 사실상 독주 체제를 굳혔다. '007' 시리즈의 테마곡에 맞춘 에너지 넘치는 연기와 조지 거슈윈의 피아노 선율에 몸을 맡긴 우아한 안무는 보는 이로 하여금 황홀한 탄성을 자아냈다. 브라이언 오서 코치와 안무가 데이비드 윌슨의 독보적 테크닉에 힘입어 ISU 여자 싱글 세계 랭킹에서도 이탈리아의 카롤리나 코스트너를 밀어내고 세계 1위에 등극했다. 김연아는 올림픽을 기점으로 세계 만방의 스타로 우뚝 서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다. 자신만만하다. 이번 동계올림픽의 가장 확실한 금메달 후보로 떠오른 국민의 기대를 잘 알고 있다면서 "내 스케이트를 완벽하게 타려는 생각을 하다보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연아는 "아직 올림픽까지 시간이 좀 남아서인지 별로 압박감을 느끼지 않고 있다"며 "내 성격이 그런 면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연아는 "선수라면 누구나 올림픽 금메달을 꿈꿀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올림픽을 자주 봐왔고 이변이 많이 일어나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일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고 금메달 획득 기대에 대한 부담을 숨기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김연아가 이제는 '즐기는' 스케이터로 거듭났다는 점이 밴쿠버의 '별'로 떠오를 수 있는 기대감을 더욱 부풀게 하고 있다. 데이비드 윌슨 안무코치는 김연아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그리 행복한 스케이터가 아니었다"고 회상했다. "부상에 시달리고 아주 수줍은 소녀였다. 그래서 처음 두 주 동안은 그녀를 웃게 하는데 힘썼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감이 붙자 적극적인 성격으로 바뀌었고 이는 올림픽 같은 큰 무대에서 더욱 빛을 발할 것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007' 주제곡을 통한 연기는 윌슨 코치의 적극적인 권유에서였다. 007 주제음악은 다이내믹하고 극적인 요소가 있어 '빅 점프'와 잘 어울린다고 판단했다. 올림픽에서 그 효과가 극대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김연아가 "아무도 내가 이런 음악에 맞춰 연기하리라고 기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아 바로 그거다"라고 의외성을 설득했다고 아이스링크에 '본드걸'이 등장한 배경을 전해줬다. 밴쿠버에서 세계를 황홀경에 빠뜨릴 김연아의 활약을 기대해본다. 갈라쇼 배경음악 '타이스의 명상곡'…잔잔하고 서정적 김연아는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에 맞춰 갈라 프로그램도 새롭게 바꿨다. 김연아가 새로 정한 갈라 프로그램 배경음악은 프랑스의 작곡가 쥘 마스네의 '타이스의 명상곡(Meditation from Thais)'이다. 팬들은 벌써부터 이 음악에 대한 정보를 주고 받느라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마스네의 작품 세계에 대한 토론을 벌이는가 하면 여러 연주자들에게 재해석된 바 있고 안무도 아직 확정되지 않았기에 저마다 어울리는 연주자와 안무를 추천하는 등 분주하다. '타이스의 명상곡'은 마스네가 오페라 '타이스'의 2막 중간에 간주곡으로 쓰기 위해 만든 작품으로 느리고 경건한 선율로 시작해 강한 변주를 거쳐 다시 도입부의 주제로 돌아가며 끝을 맺는다. 올 시즌 김연아는 갈라 무대에서 팝스타 리하나의 '돈 스탑 더 뮤직'에 맞춰 밝고 경쾌한 느낌으로 색다른 매력을 선보였지만 이번 올림픽에서는 우아한 선율에 맞춰 '여왕'의 품위를 뽐낼 참이다. 김연아는 "현재는 곡만 결정한 상태"라며 "올림픽에서는 잔잔하고 서정적인 곡이 어울릴 것 같아 곡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김연아는 일본 도쿄에서 열린 2009-2010 국제빙상연맹(ISU) 피겨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우승한 뒤에도 "올림픽을 위해 새로운 갈라쇼 아이디어를 고민하고 있다"고 갈라 프로그램을 수정할 계획을 귀띔했다. 원용석 기자

2009-12-31

[2010 희망을 쏜다-LA] 한국 아리랑국제방송 리포터 제니 조씨

지난 한해 담금질을 거쳐 올 한해 힘찬 도약을 준비하고 있는 조씨의 현재까지 성적표는 ‘A’다. 아리랑국제방송의 TV와 라디오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와 얼굴을 동시에 알리며 값진 경험을 쌓고 있다. 라디오에서는 국내 및 세계 뉴스를 보도하고 음악 프로그램에도 고정 출연, 한국영화나 드라마를 소개한다. 또, TV에서는 날씨 예보와 세계 뉴스를 시청자들에게 전달한다. 슬슬 실력을 인정받기 시작하며 활동폭이 넓어지고 있는 것이다. 조씨는 처음부터 준비된 방송인이었다. 타겟은 미국이 아닌 한국. 영한 그리고 한영 통번역 과정을 수료 한국어를 매스터했고 방송아카데미를 다니며 리포팅 에디팅 등의 방송 기술을 습득했다. UC데이비스 대학 졸업 후 글렌데일의 자폐아 봉사 기관에서 일을 하면서 어렸을 적부터 품어 왔던 방송인의 꿈을 이루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하며 주경야독을 한 것이다. 조씨는 자신의 리포팅을 담은 녹음 테이프도 늘 가방 속에 넣고 다녔다. 기회는 언제 어디서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라디오의 매력은 바로 생방송의 묘미다. 실시간으로 누군가가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는 긴장감에 오히려 스릴이 느껴진단다. 방송체질이다. TV의 매력으로는 눈과 귀를 동시에 즐겁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을 꼽았다. "TV 뉴스 앵커 등 TV 쪽에 주로 관심이 많았는데 우연한 기회에 라디오도 해보니 그것만의 재미가 있더라고요. 제가 말하면 청취자는 듣고 그런 공감대가 형성된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 같습니다." 엔터테인먼트 방송 리포터도 관심대상이다. 꼭 인터뷰하고 싶은 사람으로는 방송인 강호동과 가수 비를 꼽았다. 강호동과의 인터뷰는 재미로 넘칠 것 같고 비는 자신과는 정반대 케이스로 한국에서 태어나 자라 할리우드에 진출하기까지의 스토리를 듣고 싶은 것이 이유란다. TV 앵커 리포터 등 꿈많은 조씨의 최종 목표는 방송인으로 롱런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알리는 것이다. 이를 위해 조씨는 현재에만 안주하지 않고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도전의 기회를 찾고 있다. 재능과 함께 누구 앞에서도 기죽지 않는 그만의 당당함으로 승부한다. "목표를 가지고 한국에 왔습니다. 당당한 제 모습 그리고 재능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자신있게 열심히 하다보면 분명 계속해서 좋은 기회가 찾아오리라 믿습니다." 그는 또 철저한 자기관리에 앞장선다. 하루 평균 7시간의 충분한 수면을 취하고 또 일주일 5번 이상 운동을 하며 체력 유지에 힘쓴다. 프로가 되기 위한 필수항목이다. "감기에 걸리거나 덜컥 아프게 되면 방송을 며칠 쉬어야 합니다. 또 방송질도 떨어질 수 있습니다. 평소 꾸준한 운동을 통해 체력 증진에 힘씁니다. 훌륭한 방송인이 되기 위한 기본 자세죠." 커리어 외적으로 한국생활에도 현재까지 대만족이다. 늘 부모님과 함께 살다 홀로 한국땅에 있다보니 외로울 법도 하지만 한국 특유의 '정'문화 덕분에 무난히 적응하고 있다. 여기에 한글의 위대함도 느끼고 한국 문화도 배워가며 한국의 매력에 푹 빠졌다. "한글에서는 Love를 애정 사랑 등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참 신기했고 한글을 만드신 새종대왕이 대단하신 분이구나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여가시간엔 강남역 근처 카페에 가 일기도 쓰고 책도 읽는단다. 사람 구경도 재밌단다. "한국에서는 여자 혼자 카페에서 커피마시며 책보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저는 혼자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은데 말이죠." 그가 꼽은 한국의 명소는 다름아닌 부산. "대부분 서울만 둘러보잖아요. 그런데 부산도 참 좋더라고요. 탁 트인 해운대의 경치도 시원스러웠고 바다도 멋있었습니다. 서울 빼곤 다 시골인줄만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미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꼭 부산을 가보라고 추천해 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가끔은 LA가 생각나고 부모님도 그립단다. 특히 무남독녀로 자랐기 때문에 부모님의 사랑은 더욱 크다. "거의 매일 전화통화를 해서 그런지 몸은 떨어져 있지만 마음 속엔 늘 함께 하죠. 그래서 멀리 있다는 기분이 안듭니다." 마지막으로 한국 진출을 노리는 다른 이민 2세들을 위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조씨는 특히 "한글과 한국문화에 거리감을 두는 2 3세들의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며 한국어 학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또 글로벌 시대를 맞아 영어와 한국어 실력을 동시에 갖춘다면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렸을때 한글학교가 마냥 가기 싫었지만 부모님 때문에 다녔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님께 감사하죠. 덕분에 한글과 한국문화를 까먹지 않았으니까요." 제니는 LA한인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조갑제(58)씨와 조문희(55)씨의 외동 딸이다. 박상우 기자 swp@koreadaily.com

2009-12-31

[2010 희망을 쏜다-LA] 한인 비보이 그룹 '올 스타 브레이커스 크루(ASBC)'

"춤춘다고 다 노는 건 아니랍니다. 우리의 문화를 한번만이라도 즐겨보세요!" 시끌벅적한 교회 세미나 실 한 곳에서 친구들이 둘러보는 가운데 청소년 한 명이 머리를 바닥에 박고 몸을 한바퀴 휙 돌리고 있다. 친구들끼리 모여 싸움하는 모습이 아니다. '올 스타 브레이커스 크루(ASBC)'라는 다소 긴 이름을 가진 한인 청소년 비보이(B-Boy) 그룹 멤버들의 연습 장면이다. 이들의 연습실은 한인타운에 있는 한 교회의 1층 입구의 넓은 복도 로비. 연습 환경은 정말 열악하다. 연습하는 곳이 교회이다 보니 시끄러운 댄스 음악을 크게 틀어놓기가 힘들다. 벽에 거울이 달려 있는 연습장이나 간식은 꿈꾸지도 못한다. 특별히 정해진 춤 스승도 없다보니 세계 최고의 비보이들의 춤을 담은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가 유일한 교재다. 그럼에도 리더인 마크 장(14)군을 포함해 조셉 신(14) 앤드류 옥(15) 마틴 서(14) 윌리엄 장(15) 잭 권(13) 션 김(15) 에드워드 박(13) 이한성(13) 사무엘 이(13)의 얼굴에는 즐거움이 가득하다. 오히려 부모님의 반대가 없는 게 "얼마나 천만다행인지 모른다"고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추운 바람이 부는 길거리를 피한 것만도 감사하다"고도 말했다. 지난 해 말 13살~15살의 또래 친구들 10명이 뭉쳐 그룹을 결성했다는 이들은 그룹 이름에 대해 "별 뜻 없이 지었다. 그냥 얘기하다가 좋아하는 단어를 모아 그냥 팀 이름으로 만들었다"며 씩 웃는다. 비보이 그룹은 힙합 음악을 들으며 브레이크 댄스를 추는 흑인 남학생들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들은 과격하지도 헐렁하지도 않다. 친구들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또는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열심히 춤출 뿐이다. 결성한 지 일년 밖에 안 돼 공연 5번이 이력의 전부임에도 기죽지 않고 "미래를 위해 정말 열심히 연습하고 있다"는 이들은 내일에 대한 기대를 모아 연습에 집중하고 있다. 이들의 연습시간은 하루 평균 3~4시간. 거의 매일 모이다시피 만나 연습하다보니 그만큼 부상도 잦다. 하지만 춤추다 입는 부상은 이들에겐 훈장이다. 리더 마크의 경우 양손의 엄지 손가락뼈가 뿌러진 경험이 있고 에드워드는 왼팔의 근육이 찢어져 한동안 고생해야 했다. 하지만 부상 당시를 떠올리는 팀원들은 '다치는 것에 대한 무서움'보다는 '춤을 출 수 없는 것에 대한 아쉬움'만 가득했다. 마크는 "좀 무섭기도 했지만 그것보단 춤을 못 춘다는 게 가장 속상했다"고 솔직히 털어놨다. 이들이 갖고 있는 '춤'에 대한 열정과 진지함은 '그냥' 단순하지가 않다. 춤이 자신들에게 주는 가치와 즐거움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 팀에서 가장 먼저 춤을 추기 시작했다는 윌리엄은 "처음엔 못하던 동작을 연습을 통해 성공하면 정말 기분이 좋다. 한 가지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춤을 통해 배웠다"며 머리를 긁적였다. 조셉은 "춤을 추면 공부나 시험 등에 대한 스트레스가 날아간다"며 "힘들지만 친구들과 같이 하다보면 재미있다. 함께 하는 즐거움을 배웠다"고 말했다. 윌리엄은 "다른 친구들처럼 좋지 않은 것에 빠지기보다는 춤을 통해 스트레스를 풀어서 좋은 것 같다"며 의젓하게 설명했다. "친구 따라 아무 생각없이 그룹에 합류했다"는 잭은 "이제는 춤을 출 때가 바로 최고로 즐거운 순간이라는 걸 느낀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발견해 기쁘다"며 다른 친구들을 둘러봤다. 듣고 보니 ASBC가 이들에게 특별한 이유는 춤 뿐만이 아니다. 팀원들에게 ASBC는 '내'가 아닌 '우리'를 확인하는 공간이었다. 비보이의 춤추는 모습이 멋져 ASBC에 가입했다는 션은 "모두가 하나가 돼 춤을 추고 서로를 돕는다는 점이 가장 좋다"며 "춤이 아니더라도 모두들 팀에 끝까지 남아 서로 지켜주고 도와주는 관계로 성장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올해에는 더 좋은 실력을 갖춰 공연을 많이 하겠다"고 희망차게 말하는 ASBC 멤버들의 눈동자에는 2010년 한인사회가 꿈꾸는 희망이 반짝거리고 있다. 문진호 기자

2009-12-31

[2010 희망을 쏜다-LA] 쇼핑 검색엔진 최강자 '비컴' 마이클 양 CEO

"195번의 쓴 잔을 마셔도 다시 도전하는 것이 성공의 열쇠입니다" IT업계에서 단기간에 성공의 신화를 쏘아 올린 마이클 양(49) 비컴(Become.com)의 창업주이자 최고경영자(CEO)는 2만5000달러를 투자해서 인터넷 가격비교 사이트 '마이사이몬(MySimon.com)' 을 창립한 후 2년만에 7억달러에 매각하여 큰 화제를 불러 모았던 주인공이다. 그는 투자자에게 195번 넘게 투자요청을 거절 당했지만 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성공신화를 창조했다. 그가 두번째로 런칭한 인터넷 쇼핑 검색엔진인 '비컴'은 북가주 써니베일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현재 5개국에 있는 150여명의 직원들이 연매출 5000만달러를 올리고 있는 차세대 쇼핑 검색엔진의 최강자로 떠오르고 있다. 이처럼 IT 벤처기업으로 '성공'을 이끌고 있는 양 사장은 "내가 할 수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다"며 "창조적인 아이디어와 이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강한 추진력과 이를 도와줄 좋은 동업자만 있다면 IT업계에서 성공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고 강조했다. 2009년 1월 '포브스 아시아'에 보도된 가장 성공한 재미동포 25인 중 한명이기도 한 그를 만났다. 그의 성공 스토리에서 새 희망을 찾아본다. ▷삼성 이병철 회장을 마음에 품다 양 사장에게 경영마인드를 심어준 인물이 바로 굴지의 대기업 삼성그룹 고 이병철 회장이다. 양 사장은 "이 회장의 경영철학인 인재와 기술제일주의는 경영일선에서 직접 실천하고 있다"고 말했다. 양 사장은 1983년에 UC버클리대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했으며 1984년 아이비리그 대학인 콜럼비아대학에서 컴퓨터공학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다시 1995년 UC버클리대에서 경영석사(MBA)를 마쳐 공학자이자 경영인의 기본 자질을 닦았다. "기술을 알아야 IT업계에서 살아 남을 수 있습니다. 벤처 기업의 경우 기술을 모르고서는 좋은 인재를 채용할 수 없습니다. 제가 전자공학과 컴퓨터공학을 하지 않았다면 마이사이몬이나 비컴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성공의 신화도 없었을 것입니다." '기술을 지배하는 자가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는 말을 실감했던 것이 마이사이몬을 설립했을 때이다. 마이사이몬은 양 사장과 윤여걸 사장이 1998년 공동 설립한 온라인 가격 비교 사이트로 1000여 곳의 전자상거래 사이트로부터 제품 정보를 수집해서 책 음악 컴퓨터 가전제품 의류 장난감 등 수천가지의 제품들에 대한 가격 정보를 마이사이몬이라는 한 사이트에서 비교할 수 있게 한 신개념의 가상 장터다. 즉 인터넷 사용자들은 1000여곳의 웹사이트를 일일이 방문할 필요없이 마이사이몬에서 원하는 제품을 선택하면 가장 저렴한 가격을 제시한 웹사이트에서 그 제품을 구입할 수 있는 것. 윤사장이 개발한 '쇼핑 봇'이라는 기술덕으로 이러한 것이 가능했다. 쇼핑 봇은 1000여개 전자상거래 사이트의 제품 정보를 모아 저장하고 비교 가능하도록 하는 기술이다. 양 사장은 "이런 비교우위의 기술이 단기간 급성장의 원동력이었다"며 "기술력의 축적은 우수한 인재가 있어야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회사가 안정적으로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는 것은 그 회사를 구성하고 있는 직원들의 힘입니다. 회사를 처음 설립시 채용하는 첫 10명은 회사의 직장문화를 이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며 급변하는 IT시장에서 선두를 유지하기 위해선 뛰어난 인재 확보가 회사 생존을 좌우합니다." ▷애플사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를 만나다 1982년 UC버클리 공대에서 재학중일 때 그의 인생을 뒤흔드는 뉴스를 접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IBM사가 개인용컴퓨터(PC)를 메이시스 백화점에서 판다는 것이었다. 그는 차를 끌고 샌프란시스코로 달려가 메이시스 백화점에서 전시된 컴퓨터를 보면서 PC 혁명을 예감했다. PC를 관찰하던 중 자신과 비슷한 느낌으로 PC를 보는 사람을 발견했는데 그가 바로 스티브 잡스였다. 잡스와의 만남은 양 사장에게 벤처 기업으로서의 꿈을 키우게 하는 계기가 됐다. 이후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인터넷익스플로러와 같은 웹브라우저 '모자이크(Mosaic)'가 1987년에 등장하면서 전세계 각지의 모든 컴퓨터가 하나로 이어지는 '인터넷'이 신흥 시장으로 급부상할 것을 눈치채고 이와 관련된 사업을 해야만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깨닫게 됐다. 고등학생때 아르바이트를 하고 힘들게 번 돈으로 원하는 물건을 살 때마다 같은 제품이라도 단 1센트라도 더 싼 제품을 구매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게 됐다. 이 생각을 인터넷으로 옮긴 것이 바로 마이사이몬이다. 양 사장은 "그냥 사소하게 지나칠 수 있는 생각이나 현상을 놓치지 않고 소비자들의 요구에 부합하는 것으로 만들면 IT사업이 가능하다"며 "지금 가지고 있는 아이디어를 우습게 생각하지 말고 비즈니스 모델로 발전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무한 가능성의 인터넷을 개척하다 "현재 인터넷의 발전을 야구경기에 비교한다면 1회도 끝나지 않은 것"이라며 "인터넷은 앞으로 전기처럼 일상생활에서 없어서는 안될 정도로 깊숙이 침투할 매체로 이를 개척하고 정복하는 사람은 더욱 큰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양 사장은 강조했다. 2003년에 설립한 인터넷 쇼핑 검색엔진 비컴은 단순히 가격 비교 사이트 차원을 넘은 정보만 방대한 구글이나 야후 등의 검색엔진의 단점을 보완한 것이다. 양 사장은 "가격만을 제시하는 일반 쇼핑사이트들과 달리 유용한 상품정보는 물론 전문가들의 제품평가와 구매자문 그리고 이와 연관된 기사까지 보여 주는 등 기존 쇼핑 사이트보다 한층 집중적이고 깊이 있는 쇼핑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의 앞으로 계획은 비컴을 3년 내에 뉴욕증권시장에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기업공개(IPO)하여 연매출 1억달러의 기업으로 성장시키는 것이다. 양 사장은 "인터넷에서 급성장 가능성이 높고 더 큰 시장이 될 수 있는 블루오션을 발견하는 것이 큰 성공을 이룰 수 있는 열쇠"라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노력으로 CEO로서의 자질을 계발해야만 더 큰 기업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재능있는 한인 1.5세와 2세들이 더욱 빨리 주류사회로 진출할 수 있도록 돕는 창구를 마련해서 한인커뮤니티의 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도록 노력 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진성철 기자

2009-12-31

[2010 희망을 쏜다-LA] 드림웍스 전용덕 레이아웃 팀장

쿵푸 팬더에 이어 그가 레이아웃팀 팀장으로 참여한 두번째 작품이다. 슈렉4에 대한 기대를 걸고 2010년을 시작하는 전 감독의 발걸음은 힘차기만 하다. ▷애니메이터 입문= 전 팀장이 처음부터 애니메이터를 꿈꾼 것은 아니었다. 96년 그는 한국의 광고기획사인 금강기획에서 근무했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친구 덕분에 진로가 바뀌게 됐다. “어느날 친구가 공부하러 미국에 간다더라구요. 생각이 많아지더라구요. 일은 재미있었지만 대기업에서 근무하다보니 15년후의 미래가 훤히 보이더라구요. 다른 일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죠.” 그의 어릴적 꿈은 ‘선생’이었다. 그래서 대학원 공부를 해 교단에 서기로 생각했다. “당시 교수님을 찾아뵈었더니 디자인보다는 ‘애니메이션’을 권하시더라구요. 당시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기도 했고 해서 애니메이션을 공부하기로 했어요.” 1999년~2000년 뉴욕 ‘스쿨 오브 비주얼 아트’에서 컴퓨터 아트를 공부했다. 그리고 시카고에 있는 애니메이션 업체에 취직을 했다. “원래 계획은 공부 2년, 경력 2년해서 미국 생활 4년이었죠. 하지만 2년만에 시카고 업체가 문을 닫았고 ‘이대로 떠밀려 들어갈 수는 없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2001년 드림웍스가 제작한 TV시리즈 ‘파더 오브 프라이드’ 레이아웃팀에 취직이 되며 본격적인 애니메이터의 길을 걷게 됐다. ▷애니메이터의 길=‘파더 오브 프라이드’는 그에게 드림웍스에서 첫 작품이자 애니메이터의 길을 활짝 열어준 작품이다. 그가 레이아웃팀 팀장으로 승진된 것이 2003년 ‘쿵푸 팬더’ 제작 부터다. 입사 2년만에 팀장이 된 것은 드림웍스에서도 빠른 속도다. 그만큼 드림웍스에서 인정을 받았다. “운이 좋았죠. 쿵푸팬더 제작이 지연되면서 내정됐던 ‘레이아웃팀 팀장’이 갑자기 공석이 됐어요.” 유학시절부터 레이아웃과 함께 캐릭터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다. 드림웍스에서 처음 ‘파더 오브 프라이드’에서 작업을 하며 캐릭터의 동선에 더 신경을 썼었다. 전 팀장은 “예를 들면 일반 레이아웃팀은 캐릭터의 동선을 기계가 움직이듯 딱딱하게 구성했다면 (나는) 캐릭터의 느낌을 살려 좀더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만들려고 신경을 썼었다”며 “그 점이 인정을 받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TV프로젝트 시절 그를 유심히 봐왔던 존 스티븐슨(쿵푸 팬더 감독) 감독이 그를 레이아웃팀 헤드로 영입했다. ▷애니메이터의 꿈= 그가 ‘애니메이터’라는 직업에 가장 자부심을 느낄 때가 아들 호영이(6세)와 시영이(3세)가 그가 만든 애니메이션을 보고 좋아할 때다. “애니메이션이 워낙 아이들이 보는 영화라 애들이 친구들에게 ‘아빠가 만들었다’며 좋아하면 이 직업에 대한 애착이 더 깊어져요. 저도 애니메이션을 좋아하지만 제가 하는 일을 아이들도 좋아하니 아무리 일이 고되고 힘들어도 지치지가 않아요.”(웃음) 그에게는 계획이 있다. 바로 감독이 되는 것이다. “회사에 감독이 되고 싶다고 솔직하게 얘기했죠. 회사도 저의 계획을 호의적으로 받아주더라구요.” 다음 작품부터는 그의 역할이 보다 늘어난다. 타이틀은 레이아웃팀 팀장이지만 감독을 보좌하며 감독일에 대해 더 배우게 됐다. “감독이 되면 세계적인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처럼 상상력을 자극하는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다”고 포부를 밝히는 전 팀장의 모습에는 강한 자신감이 나타났다. ■레이아웃팀은…카메라팀 역할, 1500장면 삽입 전 팀장이 지휘하고 있는 레이아웃팀은 총 감독의 3대 주요팀에 속한다. 스토리보드팀, 캐릭터팀, 레이아웃팀이 애니메이션 제작의 주요 기둥으로 꼽힌다. 레이아웃팀은 한마디로 설명하면 영화의 ‘카메라팀’이다. 각 장면 장면의 카메라 위치, 캐릭터 위치, 캐릭터의 움직임을 결정, 장면을 구성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레이아웃팀이 슈렉이 집 앞에 서있는 장면에서 슈렉을 얼굴을 클로즈업, 또는 멀리 잡던지 등을 일일히 정하면 캐릭터팀이 그에 맞춰 캐릭터를 그리게 된다. 슈렉4는 1시간30분동안 1500여 장면이 삽입된다. 전 팀장은 “현재 애니메이션 업계는 2D에서 3D로 넘어가는 과도기입니다. 3D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우리도 배우고 연구하면서 제작합니다”라고 말했다. '슈렉4' 어떻게 제작했나 "마치 영화속 슈렉 옆에 서있는 느낌" “영화속에 들어가 주인공 옆에 서있는 느낌이 들겁니다.” 전용덕 팀장이 올해 5월 개봉 예정인 슈렉4의 특징에 대해 귀뜸했다. 전 팀장은 작년 4월부터 드림웍스에서 슈렉4의 레이아웃팀 팀장을 맡아 작업을 하고 있다. 슈렉4는 이전 1, 2, 3편과는 달리 완전한 입체 영화(3D)로 제작되고 있다. 작년 드림웍스가 처음으로 3D영화로 제작한 ‘몬스터 vs. 에일리언’에 이어 3번째 3D영화다. 최근 일부 영화에서도 도입 부분에 3D를 도입, 상영하고 있지만 드림웍스에서 제작하는 3D 애니메이션은 제작 방식부터 다르다. 대부분이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2D로 제작, 완성후 3D 테크닉을 적용해 영화나 애니메이션의 일부분을 입체 영상으로 만든다. 하지만 드림웍스 3D 애니메이션은 제작 과정부터 3D로 제작한다. 전 감독은 “애니메이션 제작시 3D를 볼 수 있는 특수한 안경을 쓰고 제작을 한다”며 “처음부터 입체감을 고려해 제작했기 때문에 2D를 3D로 전환한 것보다 피로감이 덜하고 더 생생해 기대해도 좋다”고 말했다.

2009-12-31

2010 신년특집 희망을 쏜다!

잠시, 아주 잠시만 뒤를 돌아보기로 한다. 2009년. 참 어려운 해였다. 꼬불꼬불, 한 순간도 쭉 뻗지 않았던 길 위에서 발 밑은 흔들렸고 눈 앞은 깜깜했다. 우여곡절, 그 바람 불고 비 뿌리던 길의 끝에서 다시 한 해를 마주한다. 터벅터벅, 풍랑의 한 해를 건넌 발바닥은 아직도 멀미하고 있다. 그러나 회고는 여기까지. 고마운 발을 한 번 쓰다듬어 주는 것으로 족하다. 2010년은 2009년의 어둠을 뚫고 새벽으로 솟아올랐다. 이제 새로운 10년의 시작이다. 다시 삶은 직선이 아니다. 휘어진 길의 연속이다. 강한 자는 유연하다. 휘어진 길을 만나면 길과 부딪치지 않고 선회한다. 길과 하나가 되어 리듬을 탄다. 여기 그 오랜 진실을 삶으로 증거하는 사람들이 있다. 세계 피겨 역사를 매일 같이 다시 쓰고 있는 김연아 선수. 밴쿠버 동계 올림픽을 앞두고 오늘도 쉼 없이 구슬땀을 흘리는 그녀는 정상의 자리에서도 멈추지 않는 연습과 도전의 위대함을 온 몸으로 말한다. 한인 최초로 공중파 아침 뉴스쇼의 얼굴이 된 언론인 주주 장은 노력과 근성으로 오르지 못할 자리가 없음을 웅변한다. 미국의 아침을 여는 앵커이자 세 아이의 엄마로 바쁘게 살아가는 그녀의 삶에서 근면 성실함으로 희망을 쏘아 온 한인 이민자들의 역사를 본다. IT업계의 또 다른 신화가 된 ‘비터컴’ 마이클 양 대표는 가슴에 품어 온 뜨거운 꿈이야말로 성공에 다다르는 최고의 지름길임을 삶으로 증명한다. 195번 투자 제의를 거절당하며 휘어진 길에서 방황하는 시간도 겪었지만,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연매출 5000만 달러의 기업을 이끄는 CEO로 굳게 섰다. 그에게서 한인들의 오뚝이같은 의지를 읽는다. 전 세계에서도 인정받는 한국인의 감각과 재능을 그려 보이는 애니메이터 전용덕씨는 ‘슈렉4’를 통해 다시 한번 자신의 작품으로 영화팬들을 사로잡을 생각에 가슴이 뛴다. 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잊지 않을 때 이 미국 땅에서도 가장 빛날 수 있음을 말해주는 김기수 형사는 오늘도 지역사회와 후배 경찰들을 위해 구슬땀을 흘린다. 새로운 10년의 새벽은 왔지만 불황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우리는 여전히 조금 두렵다. 하여 차라리 그 두려움을 횃불처럼 높이 들고 새로운 한 해를 향해 발을 내딛는다. 그 횃불을 희망이라 부르자. 2010년은 경인년 호랑이해. 칡흑의 숲을 간다. 밤길이다. 눈을 이글이글 켜고 어깨를 팽팽하게 긴장하고 조심스레 발을 내려놓는다. 그것을 희망의 몸짓이라 부르자. 어둠에 서 본 사람은 안다. 희망은 칡흑의 숲에서 나오지 않는다. 눈부시게 이글대는 해에서도 나오지 않는다. 희망은 사람에게서 나온다. 나에게서 나온다. 빛은 항상 안에 있다. 그리하여 다시 희망을 쏜다. 이경민 기자

2009-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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